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타구치 렌야 (문단 편집) === 전쟁 이후 === 일본 본토에서 패전을 맞이하고 [[극동국제군사재판]]에 A급(평화에 대한 죄, crimes against peace) 전범으로 기소되었다. 그러나 다른 A급 전범들 대부분이 [[전범]] 재판을 거쳐 [[사형]] 등을 받았으나 이 사람은 A급 전범으로 기소가 되었으면서도 [[극동국제군사재판]]에서 불기소 되었다.[* A급 전범의 경우는 보통 전쟁을 일으킨 소위 개전(開戰)의 죄가 있는 자들에게 기소되는 죄명이다. 아주 정확한 분류인 게, 이 인간이 [[중일전쟁]]을 일으킨 행동대장격 인간이기 때문이다. 그러니 기소가 안 될 수가 없었다. 그렇기 때문에 목이 달아나지 않고 다른 재판 중 수감으로 2년 정도만 살다 나온 것도 아주 관대한 처벌이며, 한편으로 이 자가 그 외의 [[전쟁 범죄]]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이야기도 되는 셈이다.]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불기소되었지만 숙칭 대학살[*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의 중국인 화교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. [[츠지 마사노부]]가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다.] 사건 등의 의혹으로 싱가포르로 호송되어 [[싱가포르]]에서 열린 BC급 전범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. 재판이 진행되는 2년간,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를 수감하던 싱가포르 창기 감옥에서 감방 생활을 하긴 했지만 1948년 혐의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일본에 귀국했다. 싱가포르 군사재판은 [[영국]]이 주도했으며 싱가포르 외에도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한 재판이었다. 2년간 131회의 재판이 열렸으며 400명 넘는 전범 기소자 중 유죄율은 89%였으며[* [[https://www.singaporewarcrimestrials.com/legal#legal-actors|출처는 싱가포르 전쟁 범죄 재판 웹 포털]] 참고] 교수형 및 총살형 판결만 100명이 넘어 전범에 관대한 재판은 아니었다. 그럼에도 무타구치가 석방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가 명백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. 국내에선 희화의 극대화를 위해서인지 그가 끝까지 [[불기소처분]]을 받아 아예 [[무혐의]]로 풀려났다거나[*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[[가와베 마사카즈]]가 실제로 불기소 후 완전히 석방되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수 있다.], 오히려 훈장을 받았다느니 하는 루머들이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. [[극동국제군사재판]]에서 불기소 처분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, 별도의 전범 재판을 통해[* 그것도 군복 계급장, 서훈 등 부착물은 탈거 안 했다. 아주 많이 봐준 것이다.] 2년간 감방 생활을 하긴 하였다. 다만 [[증거불충분]]으로 풀려나고, 감방 생활 동안 대접이 매우 좋았던 건 사실이라고. 돌아올 때는 살이 더 쪄서 왔다고 한다. [[일본]]에 돌아와서는 패전 책임 때문에 기도 못 펴고 살며 조용히 보냈다. 그러다 1962년 위에서 언급된 [[영국]] 육군 바커 중령과의 에피소드 이후 별안간 목소리를 내면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잘못으로 실패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http-%2F%2Fwww6.plala.or.jp%2Fguti%2Fcemetery%2FPHOTO%2FM%2Fmutaguchi_r1.jpg|width=100%]] }}} || 이후 1966년 77세로 사망했는데, 죽은 뒤에는 일본 [[도쿄]]의 공동묘지인 타마레이엔(多磨霊園)에 묻혔다. 참고로 이곳은 일본의 다른 유명한 장군인 [[도고 헤이하치로]], [[야마모토 이소로쿠]] 제독도 함께 묻혀있다.[* 원래 이곳은 [[일본]]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묻혀있는 공동묘지로 유명해서 안내도에 누가 어느 구역에 묻혀있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을 정도지만(조선총독을 역임한 [[우가키 가즈시게]], [[사이토 마코토]], 소설가 [[에도가와 란포]], 스파이 [[리하르트 조르게]]와 그 협력자인 오자키 호츠미가 묻혀있다) 이 사람의 경우 워낙 악명 높은 오물이라 그런지 안내도에 일절 적혀있지 않아 무덤을 찾기 쉬운 편은 아니다. ~~적국간첩 [[리하르트 조르게]]의 무덤도 설명이 되어있는데~~ 그리고 공동묘지 자체도 워낙 방대해서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있는데 무다구치는 [[에도가와 란포]]와 같은 26구역에 묻혀있다.] 사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무 능력보다는 [[학연]], [[인맥]]으로 진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하던 [[일본군]] 특유의 [[파벌]]주의 덕이었다. 무타구치는 당시 군부를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[[도조 히데키]]와 같은 육군사관학교-육군대학 파벌이었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